1. 기억
우리는 직관적으로 기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어제 누구와 함께 저녁을 먹었는지, 어느 중학교를 졸업했는지, 지난겨울의 추억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기억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은 무엇인지, 중력의 법칙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것도 기억 덕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억은 사실과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저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편적인 사실과 과거 경험했던 사건의 내용이 기억의 핵심 요소가 된다.
그러나 기억은 이보다 훨씬 폭넓게 세분화시킬 수 있기도 하다. 방금 본 자동차 번호판은 금방 까먹게 되지만 구구단이나 원주율은 평생 기억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 의식적으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내 몸이 무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손가락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키보드의 원하는 곳을 빠르게 누르지만, 정작 키보드의 배열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려고 하면 굉장히 어렵게 느껴진다. 어떤 음식을 먹고 체하거나 배탈이 난 뒤에는 그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고 불쾌해진다. 이러한 종류의 기억은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자동으로 생성되는 것들이다. 이처럼 우는 기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에서 분류하는 기억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학습되고 저장되고 사용된다.
2. 에빙하우스와 망각곡선
에빙하우스(H. Ebbinghaus)는 기억에 대해 최초로 체계적인 실험을 수행하여 1885년 연구 결과를 짧은 책으로 출판하였다. 당시 기억을 포함한 인간의 마음은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에빙하우스는 당시의 심리학자들처럼 기억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직관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실험을 구성하였다.
예빙하우스는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무의미 철자를 기억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자음-모음-자음으로 구성된 무의미 철자를 수천 개 생성하여 다양한 개수의 무의미 철자 목록을 학습하고 또 재학습하기를 반복하여 그 결과를 기록했다. 에빙하우스가 기억 재료로 무의미 철자를 사용한 것은 기존 지식이 기억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절약률이라는 값을 통해 기억을 측정했다. 만약 어떤 철자 목록을 완전히 학습하는 데 10회의 반복 시행이 필요했으나 일주일 뒤 7회의 반복으로 재학습되었다면 3회가 절약된 것이고, 이를 백분율로 바꾸면 절약률은 40%가 된다.
예빙하우스는 학습-재학습 간 시간이 길어질수록 절약률이 낮아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망각곡선에 따르면 우리가 기억에 대해 알고 있는 일상적인 경험과 일치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어떠한 사실을 학습한 직후 기억 손실은 빠르게 발생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느리게 발생한다. 망각곡선에 따르면 아홉 명으로 구성된 회원들의 이름을 최초 학습한 후 일주일이 지나면 대부분 잊어버리지만, 한 달 뒤에도 한두 명 정도의 이름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3. 작업기억
단기기억은 짧은 기간 잠시 활성화된 정보의 저장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복잡한 정보 처리를 설명하기 어렵다. 만약 테트리스를 하면서 동시에 전화 통화를 해야 한다면, 전화 상대의 말은 단기기억에 넣어 두고 테트리스 블록 모양과 방향을 맞추고, 또 전화에 반응하는 등의 일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블록을 맞추기 위해서 마음속에 시공간적인 조작을 수행해야 하는데, 중다저장소모형에서는 시각적 단기기억에 대한 서술이 미흡하다. 또한 복수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 서로 다른 정신 활동에 신속하게 주의를 배분하고 거둬들이는 인지 과정도 필요하다.
정보 처리의 역동적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배들리와 히치(Baddeley&Hitch)는 작업기억이라는 기억시스템을 제안하였다. 단기기억과 작업기억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단기기억이란 정보의 저장에 초점을 맞춘 표현이나, 작업기억은 정보의 처리에 초점을 맞춘 표현이다. 작업기억은 추론, 언어 이해, 문제해결, 학습과 같은 복잡한 과제에서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 유지, 변형, 조작되는지 포괄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다. 배들리는 작업기억이 음운 루프, 시공간 잡기장, 중앙집행기의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제안했다.
음운 루프와 시공간 잡기장은 용량과 지속시간이 제한된 저장공간이다. 음운 루프는 음향적인 정보를 단기적으로 저장하고 암송하는 역할을 한다. 음운 루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앞서 단기기억에서 서술한 음향혼동과 단어길이 효과를 통해 밝혀진 바가 있다. 전화번호를 되뇌거나, 장보기 목록을 중얼거리며 반복하는 것은 음운 루프를 사용한다는 직관적 증거이다. 시공간 잡기장은 시각적, 공간적 정보를 단기적으로 저장하고 조작하는 작업 기억의 구성요소이다. 약도를 보고 가야 할 진행 방향을 마음속에 떠올리고 유지하는 것도 시공간 잡기장에서 처리된다. 중앙집행기는 작업기억의 역동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배들리는 음운 루프와 시공간 잡기장을 하위 시스템이라고 칭했는데, 이 두 가지가 중앙집행기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중앙집행기의 기능은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 루프와 시공간 잡기장의 정보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테트리스를 하면서 전화 통화를 할 때 두 가지 과제에 역동적으로 주의를 분배하면서 동시에 주변의 말소리 등 불필요한 정보가 의식 속에 침투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도 중앙집행기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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